강원 산불, 소방관들의 이름 없는 전쟁(12번째 이야기)
"국가가 부르면, 우리는 간다." 그 맹세는 2019년 4월 4일, 식목일을 하루 앞둔 잿빛 저녁에 현실이 되었다. 강원도 고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순식간에 맹렬한 불꽃의 혀를 뻗으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기세를 올렸다. 건조한 대기와 매서운 바람, 험준한 산세는 불길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화마는 재난 대응 최고 단계인 3단계를 발령시켰다. 전국의 소방서에 일제히 출동 경보가 울렸다.
전남 영광 소방서의 허번영 소방사와 최진영 소방위는 4월 5일 새벽, 긴급 출동 지령을 받았다. 망설일 틈도 없이, 그들은 낡은 방화복을 꿰어 입고 장비를 챙겨 낡은 펌프차에 몸을 실었다. 400km가 넘는 머나먼 화재 현장까지, 텅 빈 물통처럼 마음도 비운 채 굉음을 내며 달려가야 했다. 새벽 2시, 칠흑 같은 어둠이 도시를 감싸고, 텅 빈 도로 위를 질주하는 그들의 심장은 쉴 새 없이 펌프질을 해댔다.
고속도로는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수백 대의 소방차들로 가득 메워졌다. 붉은 사이렌 빛은 밤의 정적을 깨뜨리고, 차량 라디오에서는 긴박한 상황 뉴스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허 소방사는 휴게소에 들어서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웅웅거리는 엔진 소리, 타이어가 뜨겁게 달궈진 냄새, 섞여드는 담배 연기. 그 모든 소음과 냄새를 뚫고 펌프차들의 번호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원, 경북, 전남… 제각기 다른 지역명이 박힌 번호판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묘하게 뜨거웠다. 하지만 시선을 잡아끈 건, 번호판 위의 선명한 두 글자, “소방”이었다.
전국 팔도에서 모인 낯선 얼굴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소방’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였다. 허 소방사는 그 단단한 연대감에 가슴이 묵직해짐을 느꼈다. 각자의 지역에서 화마와 싸우던 이들이, 이제 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국가대표 선수들이 드높은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결전을 준비하는 듯, 휴게소는 비장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컵라면을 허겁지겁 삼키는 얼굴, 굳게 다문 입술, 초조하게 담배를 태우는 손끝. 그들의 침묵은 수많은 화재 현장에서 겪었던 절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투지를 담고 있는 듯했다. 허 소방사는 자신 역시 그 묵묵한 행렬에 합류했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굳게 주먹을 쥐었다. 이제 그도, ‘소방’이라는 이름으로, 그들과 함께 불길 속으로 뛰어들 차례였다.
허 소방사는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간신히 졸음을 쫓고, 방화복과 무거운 공기호흡기를 다시 점검했다. 두려움은 없었다. 단 하나의 생각만이 그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우리가 막지 않으면, 국민이 위험하다.” 그는 닳아빠진 안전모를 깊게 눌러썼다.
고성에 도착했을 때,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산은 마치 거대한 용이 분노하는 듯했고, 검은 연기는 하늘을 가득 뒤덮어 햇빛조차 가렸다. 집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하게 타버린 채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불씨는 쉴 새 없이 새로운 불길을 만들어냈고, 매캐한 연기는 숨통을 조여 왔다. 살갗을 에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 집은 우리가 지킵니다.” 최진영 소방위의 우렁찬 외침이 허공을 갈랐다.
최 소방위와 허 소방사는 무전을 통해 관할 지휘부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펌프차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 짧고 굵은 지시에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펌프차 엔진이 굉음을 내며 웅크린 맹수처럼 끓어올랐다. 두 사람은 묵묵히 장비를 점검하며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다.
저 멀리, 붉은 악마가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섬뜩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화마'라는 단어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불길은 굶주린 맹수처럼 순식간에 주택을 집어삼키려 달려들었다.
"최 주임님, 시작합니다!" 허 소방사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펌프차의 엔진이 굉음을 토해냈다.
두 소방관은 망설일 틈도 없이 관창을 잡고 불길을 향해 물줄기를 쏘아댔다.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는 맹렬한 불길에 맞서 하얀 포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불길은 끈질겼다.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맹렬하게 타올랐고, 거센 바람은 불씨를 잡아 흩뿌리며 저항했다. 불똥이 헬멧과 방화복에 쉴 새 없이 튀었다.
최 소방위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다. 허 소방사는 굵은 땀방울을 훔쳐내며 악착같이 호스를 붙잡았다. 그들의 손은 뜨겁게 달아오른 관창을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호스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물줄기는 단순한 진화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굳건한 의지, 불가능에 맞서는 용기의 발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온몸은 땀과 그을음으로 범벅이 되었고, 방화복 안은 찜통처럼 뜨거웠다. 숨소리는 턱밑까지 차올라 점점 거칠어졌다. 팔은 쉴 새 없는 물줄기의 압력에 굳어갔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이제 그만…' 하는 나약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들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의 등 뒤에는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놓인 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 소방위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허 소방사 역시 굳은 얼굴로 최선을 다했다. 마침내, 거세게 타오르던 불길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검붉은 화염은 잿빛 연기로 바뀌었고, 맹렬한 기세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집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을렸지만,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버텨냈다.
완전히 진압된 화재 현장은 처참했다. 하지만 두 소방관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감돌았다.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들의 심장은 뜨겁게 타올랐다. 그을음투성이의 얼굴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그 모습은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소방관이었다.
소방관에게 ‘현장’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전장과 같다. 그날의 고성은 거대한 전쟁터였다. 전국에서 달려온 소방관들은 말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맹렬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누구 하나 영웅처럼 폼을 잡지도 않았고, 떠벌리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서로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당신도 싸우고 있군요. 나도 그렇습니다.” 함께 땀 흘리고, 함께 불길에 맞서는 동료의 존재는 그 자체로 큰 힘이 되었다.
복귀하던 길, 다시 들른 휴게소에는 또 다른 시·도에서 출동한 소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낡은 방화복엔 화마와 맞선 흔적이 진하게 배어 있었고,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피로와 자부심이 공존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정말 고맙습니다”라며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고, 누군가는 박수를 보냈다. 허 소방사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말은 없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 마음이 뜨겁게 요동쳤다.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불길을 향해 쏘아 올리던 마지막 물줄기,
울먹이며 “고맙다”고 속삭이던 주민의 눈동자,
타오르는 연기 너머로 동료가 소리 없이 내미는 손짓…
그 모든 순간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마치 잊지 말라는 듯이.
소방서로 복귀한 뒤, 허 소방사는 조용히 자신의 낡은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날을 이렇게 남겼다.
“2019년 4월 5일, 고성.
우리는 그날, 대한민국을 대표했다.
진짜 국가대표는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서는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불 속에서 국민을 지켰다.
우리는, 소방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