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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통 없이 바다를 누비다” – 제주해녀의 유전자에 숨겨진 생존의 진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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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통 없이 바다를 누비다” – 제주해녀의 유전자에 숨겨진 생존의 진화

마인드헌터(MindHunter) 2025. 5. 1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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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다는 기억한다 – 해녀의 유전자가 말하는 생존의 서사

지난 반세기 동안 과학은 인간의 육체가 어떻게 환경에 적응하는지를 설명해왔다. 고산지대의 티베트인, 사막의 베두인, 정글 속 피그미족까지—이제 그 리스트에 당당히 한 축을 더할 때가 됐다. 바로, 제주도의 해녀들이다.

 

최근 발표된 Cell Reports의 연구는 해녀라는 직업이 단지 숙련의 결과일 뿐 아니라, 수천 년간 이어져온 바다와의 싸움 속에서 우리 몸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한다. 해녀는 단순히 바다에 뛰어드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산소통 없이 수십 초에서 수 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찬 바닷속을 누비며 생업을 이어가는 잠수 전문 여성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몸, 더 정확히는 유전자에는 이 고된 생업을 감당하기 위한 비밀이 새겨져 있었다.


2. 잠수할 때 심장이 천천히 뛰는 이유

모의 잠수 실험에서 해녀들의 심박수는 평균 18.8회/분이나 떨어졌다. 같은 제주도에 거주하지만 해녀가 아닌 여성들은 12.6회/분에 그쳤다. 한 해녀의 경우에는 15초도 안 돼 심박수가 40회 이상 감소하기도 했다. 이 놀라운 생리 반응, ‘서맥(徐脈)’은 심장이 느리게 뛰며 산소 소모를 줄이는 일종의 에너지 절약 모드다.

 

그런데 이 반응은 유전 때문이 아니라 ‘훈련의 산물’이다. 수십 년간 반복된 잠수가 신체를 변화시킨 것이다. 이처럼 ‘후천적 적응’이란 말로도 설명되는 생리 반응은, 우리가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고 몸을 조율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해녀의 몸속에는 진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3. 유전자에 각인된 한랭 적응

제주도 해녀와 주민의 약 33%는 본토 한국인의 7%만이 지니고 있는 유전자 변이를 갖고 있다. 이 유전자는 이완기 혈압을 낮추고, 저체온증에서 몸을 보호하며, 특히 임신 중 고혈압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유전자는 단순히 해녀의 생존을 돕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특정 환경에 맞게 ‘선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예컨대 차가운 유럽으로 이주한 인류는 ACTN3 유전자 변이를 통해 떨림 없이 열을 생성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핀란드인의 88%는 한랭 감지 수용체인 TRPM8 유전자 변이를 지니고 있지만, 나이지리아인은 5%에 불과하다. 제주 해녀에게서 나타나는 유전적 적응은 바로 이러한 ‘기후 적응 진화’의 또 다른 사례인 셈이다.


4. 임신 중에도 잠수하는 여성들

과거의 해녀는 임신 중에도 물질을 쉬지 않았다. 임신한 여성에게 찬물은 극한의 환경이다. 그럼에도 해녀들은 그 속에서 생존했다. 이번 연구는 이런 생존이 단지 근성이나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유전적으로 보호받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낮은 이완기 혈압은 임신성 고혈압을 줄이고, 한랭 저항성 유전자는 저체온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다. 아이를 가진 여성조차 바닷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이유가, 과학적으로 설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5. 생존, 진화, 그리고 과학

이 연구는 단지 한 직업군의 특성을 규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갈 수 있을지를 묻는다.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고, 고통을 통해 적응하며, 그 변화를 후손에게 전달한다. 해녀의 유전자가 증명하듯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위기를 생물학적 약자로부터 배우고 있다. 바다의 여인들이 몸소 써 내려간 생존의 연대기는, 유전학이 증명하고 생리학이 해석하고 있다.

 

그들의 삶은 한 세대의 숙련을 넘은, 수세기 유전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지금도 제주도의 바다에서, 누군가의 조용한 심장 박동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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