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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미로(Mind Maze)

2017년 4월 17일. 늦은 토요일 밤, 추월산은 낮 동안의 화려한 봄기운을 뒤로하고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도시의 불빛과는 격리된 이곳은 오직 별빛만이 희미하게 길을 비추고, 나무들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기나긴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담양소방서 119구조대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밤은 언제나 긴장과 책임감으로 팽팽하게 채워져 있었다. "구조출동! 구조출동! 담양군 추월산 조난자 발생." 방송의 날카로운 외침이 정적을 찢었다. 짧고 간결한 메시지였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구조대원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편안한 주말 저녁은 이미 그들에게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그들은 숙련된 움직임으로 출동 준비를 시작했다. 119 상황실로 다급한 목..

2009년 7월 1일, 무더위가 도시의 숨통까지 죄어오던 한여름. 안방순 소방장은 24시간의 전일 근무를 마치고,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끌고 소방서를 나섰다. 발끝에 힘이 풀린 단화는 아스팔트를 쓸며 무겁게 끌려갔고, 방화복 속에서 땀과 연기로 뒤엉킨 살갗은 한 걸음마다 쓸렸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문고리를 잠시 잡은 채 한숨부터 내쉬었다. '오늘은 제발, 오늘만큼은 진짜 좀 쉬자.' 집 안은 조용했고, 낡은 선풍기 하나가 무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현관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벗어 던진 옷들을 피해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는 굳어진 어깨를 후려쳤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는 그의 등에선 한동안 물소리만 흘러내렸다. 온몸에서 소방서 냄새가 빠져나가자, 비로소 ..

1997년 8월 1일, 김병준에게 그날은 단순한 달력 속 숫자가 아니었다. 땀과 눈물,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지난 시간을 보상받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벅찬 감동이 밀려오는 날이었다. 서울 변두리, 야근에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 책상 앞에 앉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시간들. 졸음과 싸우며 몰래 눈물을 훔치던 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던 소방관 시험 합격이라는 빛나는 결실을 손에 쥐었다.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던 순간,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는 굳게 다짐했다. 이제부터 그의 삶은 오롯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되리라고. 그는 망설임 없이 전라남도 진도를 선택했다. 서울에서의 안락한 삶 대신, 남쪽 끝 작은 섬, 진도 소방서에서 그의 소방..

2023년 5월, 늦봄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던 토요일 아침. 광주광역시 그 외곽에 자리한 테니스 코트에 테니스를 취미로 하는 많은 동호인들이 모여 활기가 가득했다. 광주지역 아마추어 테니스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코트 위에는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열기가 피어올랐고, 클럽 하우스 주변에 갓 피어난 형형색색의 꽃들은 봄의 향기를 흩뿌리며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웃음소리와 힘찬 파이팅 소리, 경쾌하게 공을 받아치는 라켓 소리가 싱그러운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문재명 소방장은 그 평화로운 풍경 속에 서 있었다. 올해로 10년 차 베테랑 소방관인 그는, 방화복 대신 산뜻한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와 잿더미 대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무전기 대신 테니스 라켓을 손에 쥐고 있었다. 화재 ..

2021년 추석 연휴, 모두가 풍요로운 마음으로 고향을 찾았을 그 때, 전남 담양소방서 구급대 정일권 소방관의 하루는 쉴 새 없이 울리는 무전 소리로 시작되었다. 10년의 베테랑 구급대원인 그는 명절 연휴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바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날은 유독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출근하자마자 구급차에 몸을 싣고 읍내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질주했다. 굽이굽이 시골길을 돌아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고, 다시 소방서로 돌아오기도 전에 다음 출동 지령이 떨어졌다. 사무실 의자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그는 하루 종일 구급차 안에서, 혹은 병원 응급실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편의점에서 허겁지겁 집어 든 삼각김밥과 바나나우유가 전부였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여유조차 없었다. 연휴, 담..

초여름 햇살이 쏟아지던 2020년 5월, 오후의 도심은 한가로워 보였다. 창밖 흰 구름은 유유히 흘렀지만, 소방서 내부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문연희 소방장은 벌써 세 번째 구급 출동을 마치고 돌아온 터였다. 교통사고 환자는 머리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중년 남성.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의식이 불안정해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앰뷸런스 내부는 고단했던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엉겨 붙은 먼지와 튄 핏자국, 땀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문 소방장은 마스크 안으로 무거운 숨을 삼켰다. 쉴 새 없이 울리는 무전 소리에 닳아버린 체력, 헬멧 안에서 땀으로 젖어 짓무른 뒷목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세차 호스를 잡았다. 거친 물줄기가 앰뷸런스 표면에 엉겨 붙은 먼지를 씻어냈다. 물기를 닦..

전남의 어느 소방서, 그곳에서 서인규는 그림자 같았다. 25년 가까운 세월을 묵묵히 화마와 싸워온 그는, 낡은 방화복처럼 닳고 해진 베테랑이었다. 그의 이름 석 자는 동료들 사이에서 훈장과도 같았다. 누구보다 먼저, 망설임 없이 화염 속으로 뛰어드는 그의 뒷모습은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맹렬한 불길이 덮쳐오는 순간에도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춤추는 불꽃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손길이 닿은 장비는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다. 낡은 호스 하나, 녹슨 렌치 하나도 그의 손을 거치면 새것처럼 변했다. 묵묵히, 그리고 완벽하게. 그는 말이 없었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곧 훌륭한 교범이었다. 서인규는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25년 동안, 그는 ..

2008년 4월, 화순의 봄은 야속하게도 성급히 여름을 재촉하고 있었다. 박정경 소방위와 김인수 소방교는 연일 이어지는 소방 검사에 지쳐갈 즈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어깨는 무거웠다. 화재는 계절을 가리지 않았고, 작은 부주의가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소방 검사는 단순한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었다. 건물 곳곳에 설치된 소방시설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꼼꼼히 살피고, 혹시라도 미비한 점이 있다면 신속하게 개선하도록 조치하는 일이었다. 화재 발생 시, 단 하나의 오작동도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이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날, 박 소방위와 김 소방교는 5층짜리 상가 건물의 소방 검사를 위해 나섰다. 1층에는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국가가 부르면, 우리는 간다." 그 맹세는 2019년 4월 4일, 식목일을 하루 앞둔 잿빛 저녁에 현실이 되었다. 강원도 고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순식간에 맹렬한 불꽃의 혀를 뻗으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기세를 올렸다. 건조한 대기와 매서운 바람, 험준한 산세는 불길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화마는 재난 대응 최고 단계인 3단계를 발령시켰다. 전국의 소방서에 일제히 출동 경보가 울렸다. 전남 영광 소방서의 허번영 소방사와 최진영 소방위는 4월 5일 새벽, 긴급 출동 지령을 받았다. 망설일 틈도 없이, 그들은 낡은 방화복을 꿰어 입고 장비를 챙겨 낡은 펌프차에 몸을 실었다. 400km가 넘는 머나먼 화재 현장까지, 텅 빈 물통처럼 마음도 비운 채 굉음을 내며 달려가야 했다. 새벽 2..

조명재 소방교의 2020년 2월은, 마치 숨소리조차 멎게 하는 고요한 폭풍의 눈과 같았다. 2019년 늦가을, 박쥐의 날갯짓처럼 시작된 중국 우한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전 세계를 덮쳤다. ‘코로나19’. 그 이름은 섬뜩한 예언처럼, 인류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바꿀 거대한 재앙의 서막이었다. 대한민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2020년 1월 20일, 첫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는 불안과 공포를 씨앗처럼 뿌렸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적에게 쫓기는 듯 숨죽이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2월, 대구에서 신천지라는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코로나19 감염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대한민국은 존망의 기로에 섰다. 의료 시스템은 순식간에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고, 병상은 턱없이 부족했으며, 119 구급대의 싸이렌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