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미로(Mind Maze)

가장 무서웠던 날, 가장 빛났던 이름(18번째 이야기) 본문

당신은 영웅입니다.

가장 무서웠던 날, 가장 빛났던 이름(18번째 이야기)

마인드헌터(MindHunter) 2025. 4. 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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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1일, 김병준에게 그날은 단순한 달력 속 숫자가 아니었다. 땀과 눈물,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지난 시간을 보상받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벅찬 감동이 밀려오는 날이었다. 서울 변두리, 야근에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 책상 앞에 앉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시간들. 졸음과 싸우며 몰래 눈물을 훔치던 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던 소방관 시험 합격이라는 빛나는 결실을 손에 쥐었다.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던 순간,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는 굳게 다짐했다. 이제부터 그의 삶은 오롯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되리라고. 그는 망설임 없이 전라남도 진도를 선택했다. 서울에서의 안락한 삶 대신, 남쪽 끝 작은 섬, 진도 소방서에서 그의 소방관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낯선 섬, 진도. 서울 촌놈에게 섬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푸른 바다와 짭짤한 바람,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는 점차 소방관으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생애 처음으로 지급받은 소방 유니폼을 입던 날, 그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묘한 책임감과 설렘을 느꼈다.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 그는 늘 가슴 속에 새겼던 그 문장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홀로 고향을 떠나 머나먼 진도로 향할 때, 그는 굳게 결심했다.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도, 거센 물살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수마 속에서도, 그는 단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겠다고. 그는 소방 호스를 잡는 법, 구조 장비를 다루는 법, 응급 처치하는 법 등 소방관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기술들을 밤낮없이 익히며 실력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재 진압보다는 벌집 제거, 고양이 구조 같은 생활 민원이 대부분이었다. 때로는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고, 억울한 민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작은 도움이라도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고, 진심을 다해 사람들을 도왔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1998년 3월, 담양소방서가 새롭게 문을 열면서 그는 곡성119안전센터로 발령받았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설렘과 함께, 그는 곡성에서의 생활을 기대했다. 새벽 공기가 싸늘하게 감도는 첫 출근길, 그는 낡은 자전거를 끌고 곡성 골목골목을 누비며 지리를 익히고자 애썼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낮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겨운 풍경, 그는 곡성의 구석구석을 눈에 담으며 이 곳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그러나 그의 다짐이 채 여물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현실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곡성 발령 통지서를 받아들던 날의 덤덤함은, 낯선 땅을 밟는 순간 미세한 설렘과 불안으로 바뀌었다. 곡성119안전센터에 도착해 개인 짐을 사물함에 넣을 때, 김병준은 마치 이삿짐을 정리하는 이방인 같은 기분이었다
 
소방서 구석, 낡은 펌프차와 구급차는 묵묵히 그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병준은 꼼꼼하게 장비들을 점검했다. 관창의 묵직함, 산소통 게이지의 안정적인 숫자, 구조 장비들의 날카로운 윤기. 마치 앞으로 자신이 짊어질 생명의 무게를 가늠해보듯, 그는 장비 하나하나를 매만졌다. ‘오늘은 그냥 장비 익히며 조용히 지나가겠지.’ 그의 바람은 순진한 기대에 불과했다.
 
밤은 깊어지고, 소방서 내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김병준은 침대에 누워 뜬눈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고향 담양과는 다른, 낯선 밤의 정적. 작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잠이 들락 말락 하던 찰나, 찢어지는 듯한 화재경보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단잠은 산산이 부서지고,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방화복을 움켜쥐었다. 무전기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곡성 ○○장애인복지관… 화재발생, 화재발생!”
순간, 김병준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곡성에 발을 디딘 지 고작 몇 시간. 복지관의 위치는커녕, 지도 한 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다. 망설일 틈도 없이, 그는 본능적인 감각에 의존했다. ‘출근길에 슬쩍 봤던 그 건물일 수 있어… 커다란 간판이 붙어있던…’
 
“사이렌 켜! 빨리!” 옆자리에 앉은 베테랑 선배의 다급한 외침에, 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붉은 경광등이 쉴 새 없이 깜빡이며 어둠을 찢었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잠든 마을을 깨웠다. 진도을 떠나온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신참 소방관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차가 좁은 시골길을 질주하는 동안, 창밖 풍경은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고요하던 새벽의 풍경은 붉은 화마의 기세에 휩싸여 불안과 공포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복지관이 가까워질수록, 매캐한 연기 냄새가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김병준은 침착하게 호흡기를 착용하며,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사람을 구해야 해.’ 그의 눈빛은 낯선 두려움 대신, 뜨거운 사명감으로 타올랐다.

 
잿빛 연기가 매캐하게 코를 찔렀다. 김 소방사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화복이 제 역할을 하는 건지조차 느낄 새도 없이, 눈앞의 복지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 있어요! 안에 사람 있어요!” 다급한 외침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복지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불길은 삽시간에 복도를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타올랐고, 검은 연기는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시야를 가렸다.
 
“여기요! 도와주세요!”
 
희미하게 들려오는 절박한 목소리에 김 소방사는 본능적으로 발길을 옮겼다. 연기 속에서 희미하게 형체가 드러난 건 정신지체가 있는 아이였다.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김 소방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밖으로 나가자!”
김 소방사는 침착하게 아이를 안았다. 아이의 몸은 굳어 있었지만, 그의 작은 손은 필사적으로 김 소방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불길은 더욱 거세졌고, 연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뜨거운 열기가 방화복을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안 돼, 여기서 쓰러질 순 없어.’
 
김 소방사는 이를 악물고 아이를 업은 채 복지관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에는 이미 선배 소방관들이 도착해 화재 진압과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선배들에게 인계하고 다시 복지관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직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쪽 방에 아이들이 있어요! 움직일 수 없는 아이들이!”
 
한 자원봉사자의 외침에 김 소방사는 망설일 틈도 없이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은 장애 아동들을 위한 방이었다. 연기로 가득 찬 방 안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겁에 질린 채 울고 있었다. 김 소방사는 아이들을 한 명씩 업고, 안고 밖으로 옮겼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 정신을 잃어가는 아이도 있었다. 그는 아이들의 얼굴을 두드리며 정신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괜찮아, 괜찮아. 곧 나갈 수 있어. 조금만 참아.”
 
구조 활동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김 소방사는 온몸이 땀과 그을음으로 뒤덮였지만, 쉴 틈도 없이 구조에 매달렸다. 그는 불길 속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부상자들을 응급 처치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몇몇 사람이 연기를 많이 마셔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모두 무사할 거라는 소식에 김 소방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복지관 건물은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신고식은 그야말로 ‘불 속에서’ 치러졌다. 며칠 후, 선배들은 그를 격려하며 농담을 건넸다. “병준, 이제 큰 고비 하나 넘겼으니까 당분간은 조용할 거야. 첫 출동부터 이렇게 큰 화재를 겪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닥쳐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김 소방사가 겪어야 할 진짜 시련은, 그로부터 한 달 뒤,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그 불길 속에서 용기를 얻었지만, 동시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상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할 것이다.
 
몇 달이 쏜살같이 지나 여름이 기어이 찾아왔다. 쨍한 햇살은 살갗을 뚫을 듯 따가웠지만, 곡성과 지척인 지리산 품 안의 계곡물은 뼈 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왁자지껄한 가족들과 팔짱을 낀 연인들이 그늘 아래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아이들의 해맑은 물장구 소리와 웃음소리가 청량하게 계곡을 채웠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 누구도, 앞으로 닥쳐올 끔찍한 비극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자연은 늘 그랬다. 아무런 예고 없이, 무자비하게 등을 돌려버린다.
그날 아침, 하늘은 태생부터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낮부터 짙게 드리운 먹구름은 마치 검은 장막처럼 태양을 가려 버렸고,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도 전에 하늘 전체를 집어삼켰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던 그때, 기다렸다는 듯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최첨단 기상 장비로 무장한 기상청의 예보조차 무용지물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그야말로 재앙과 같은 폭우였다.
 
구례, 산청, 하동, 함양… 평화로운 여름을 꿈꾸며 사람들이 모여든 지리산 자락은 순식간에 절규와 비명으로 뒤덮였다. 시간당 145mm를 넘나드는 무시무시한 폭우, 특히 피아골엔 300mm, 대원사 계곡엔 262mm라는 기록적인 물폭탄이 쏟아졌다. 그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그곳은 더 이상 계곡이 아니었다. 댐이 무너진 듯, 거대한 물폭탄이 쏟아져 내리는 지옥도였다. 그날 빗줄기는 단순한 '비'가 아니었다. 맹수처럼 날카롭고 사나운, 폭력 그 자체였다. 찰나의 순간에 쏟아진 엄청난 양의 물은 흙을 갈라 엎고, 단단한 바위를 깎아냈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평소에는 더없이 잔잔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던 계곡물은 순식간에 흉측한 괴물로 돌변했다. 단란한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텐트는 종잇장처럼 휩쓸려 사라졌고, 물놀이를 즐기던 사람들은 미처 몸을 피할 새도 없이 급류에 휩쓸렸다. 미처 세월교를 건너지 못한 차량들은 속수무책으로 물속에 잠겼고, 계곡을 따라 평화롭게 늘어서 있던 마을들은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내린 산사태에 흔적도 없이 파묻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곡성119안전센터는 일찌감치 비상 근무 체제에 돌입했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었다. 김병준 소방사는 굳게 입술을 깨물며 소방차에 몸을 실었다. "하늘이… 정말 미쳤나 봐…" 그의 뇌리에는 며칠 전 TV 뉴스에서 흘러나오던 기상 예보가 스쳐 지나갔다. ‘국지성 호우’. 그 단어는 현실이 되어 끔찍한 재앙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구례, 하동, 지리산 자락 그리고 곡성에 있는 도림사계곡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계곡에 놀러와 고립되어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고가 빗발쳤다.  "야영객 수십 명 고립!" "구조요청!"  절박한 외침들은 희망을 갈구했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메아리칠 뿐이었다.
 
계곡은 더 이상 맑고 청량한 물줄기가 아니었다. 흙과 나무, 돌덩이, 그리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집어삼킨 거대한 흙탕물의 괴물이었다. 굉음을 내며 휩쓸려가는 물줄기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였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쉴 새 없이 계곡을 후려쳤다. 김병준 소방사의 눈에 들어온 건, 흙탕물에 잠긴 계곡, 휩쓸려 다니는 잔해들, 그리고 절망에 젖은 얼굴들이었다. "젠장…!" 김병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로프! 빨리!”

빗발 속에서 선배의 목소리가 갈라질 듯 울려 퍼졌다. 김병준 소방사와 동료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익숙하게 손에 익은 로프가 풀려나갔고, 누군가는 말없이 카라비너를 꺼내 고정 장비를 점검했다. 긴박함이 공기를 짓눌렀다.
 
“저기 보이는 나무! 가장 굵은 걸로! 꽉 묶으세요! 절대, 절대 놓지 마세요! 우리가 갑니다!”
 
구조팀 선임이 빗속을 가르며 소리쳤다. 고립된 사람들에게 닿기 위해 그의 목소리는 비명을 삼킨 빗줄기를 밀어냈다. 계곡 반대편, 떨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물안개 사이로 간신히 보였다.
 
그때, 김종록 소방교가 로프 끝을 손에 쥐었다. 말없이 헬멧을 조이고, 안전벨트를 다시 확인한 그는 조용히 말했다.
“제가 먼저 건넙니다.”
 
그 한마디가 현장을 무겁게 감쌌다. 특전사 출신답게 그는 수많은 극한 상황을 견뎌온 사람이었지만, 눈앞의 계곡은 그조차도 긴장하게 만들 만큼 거칠었다.
 
로프를 단단히 몸에 감고 그는 계곡물 가장자리로 나아갔다. 수면 아래는 보이지도 않는 소용돌이가 매섭게 흐르고 있었다. 발끝이 물에 닿는 순간, 김병준은 숨을 멈췄다.
 
첫 걸음을 내딛자마자, 김종록 소방교의 다리가 휘청였다. 시야는 물안개에 가려졌고, 물살은 허리까지 차올랐다. 마치 거대한 손이 몸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꽉 잡아!” 누군가 소리쳤지만, 그 소리는 금세 빗소리에 삼켜졌다.
 
김종록 소방교는 두 손으로 로프를 움켜쥐며 바위 사이를 짚어 나아갔다. 물살이 그의 어깨를 때릴 때마다, 이빨이 으드득 갈렸다. 미끄러운 돌에 발이 밀려 몸이 한쪽으로 쏠리기도 했지만, 그는 자세를 다시 잡았다. 바위 모서리에 무릎이 찍혀 피가 배어 나와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김병준 소방사는 반대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로프를 감았다 풀었다 하며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제발, 무사히 건너기만 해요…’

그의 손은 땀과 빗물로 미끄러워졌지만, 눈은 김 소방교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가까스로 중간 지점을 지난 김종록 소방교는 다시 자세를 낮췄다. 물은 여전히 맹수처럼 그를 밀쳐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한 손 한 손, 무릎 한 발을 버티며 결국 반대편 바위에 닿았다.
 
마침내 김종록 소방교가 반대편에 도착했다. 빗물에 젖은 그의 얼굴은 흙투성이였지만,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는 떨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안전해요. 저희가 반드시… 전부 구해드릴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김종록 소방교는 서둘러 야영객들이 엉성하게 묶어놓은 로프를 점검하고 보강했다. 그리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한 명씩 구조가 시작되었다. "천천히! 로프 꽉 잡으세요! 저만 보고! 괜찮아요, 괜찮아…!" 김종록 소방교는 끊임없이 말을 건네며 그들의 불안감을 잠재웠다. 그의 손은 젖은 로프에 쓸려 붉게 부어올랐지만, 놓지 않았다.

 
김병준과 다른 대원들은 온 힘을 다해 로프를 잡아당겼다. 물에 젖어 무거워진 몸을 끌어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필사적인 의지가 가득했다. 한 명, 또 한 명… 기적처럼 모든 사람들이 구조되었다. 계곡 너머에서 터져 나온 것은 환호성이 아닌, 울음이었다. 삶에 대한 감사, 안도감, 그리고 구조대원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김병준은 헬멧을 고쳐쓰며 흐르는 눈물을 감췄다.
 
곡성에서는 기적을 만들었지만, 다른 지역은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다. 구례, 산청, 하동… 폭우에 휩쓸린 수많은 사람들의 실종 및 사망 소식이 쉴 새 없이 전해져 왔다. 김병준은 물가에 주저앉아 젖은 장갑을 벗었다. 그의 시선은 허망하게 하늘을 향했다. 살려낸 사람들의 얼굴과, 미처 구하지 못한 이름 모를 희생자들의 모습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 한 번의 한밤중 대폭우(대원사계곡 262mm, 피아골 300mm)로 지리산 일대에서만 사망자 68명, 실종자 10명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지리산 계곡과 연결되는 덕천강 일대에서도 세월교를 통해 덕천강을 건너서 대피하려던 일부 야영객들이 순식간에 불어난 강물에 휩쓸리는 바람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지리산 인근 마을에서도 폭우로 인해 산사태가 발생하여 주민들이 집에 있다가 그대로 쓸려가거나 매몰되어 숨지는 등 지리산 인근 남부 지방에서도 25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전체 10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사고 발생 후, 실종자 수색은 멈출 수 없는 사명이 되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소방관들은 한 달 내내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수색했다. 비번은 그들에게 사치였다. 폭우가 할퀴고 간 자리를 다시 샅샅이 뒤졌다. 진흙투성이, 땀범벅이 된 얼굴에는 피로가 짙게 드리워졌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매일같이 수색 현장을 찾아와 넋이 나간 얼굴로 실종된 가족의 이름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절망과 고통은 고스란히 소방관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밤에는 악몽에 시달렸고, 아침에는 더욱 무거운 마음으로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날 이후, 김병준에게 '출동'이라는 두 글자는 뼛속까지 무겁게 새겨졌다. 이전에는 그저 의무감으로 여겼던 출동 벨 소리가, 이제는 가족의 생사를 기다리는 절박한 외침처럼 들려왔다. 특히 그날 밤, 거센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던 김종록 소방교의 젖은 등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두려움 없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직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모습은 김병준에게 '소방관'이라는 이름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주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가장 먼저 재난 현장으로 뛰어드는 사람, 절망에 빠진 누군가의 절규에 온몸으로 응답하는 사람. 그것은 단순한 직업이 아닌, 숭고한 헌신이었다. 김병준은 그의 선배처럼, 국민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그런 자랑스러운 소방관이 되기로 마음속 깊이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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