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미로(Mind Maze)
당신의 편의가 누군가의 마지막 기회를 앗아갑니다(16번째 이야기) 본문

2021년 추석 연휴, 모두가 풍요로운 마음으로 고향을 찾았을 그 때, 전남 담양소방서 구급대 정일권 소방관의 하루는 쉴 새 없이 울리는 무전 소리로 시작되었다. 10년의 베테랑 구급대원인 그는 명절 연휴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바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날은 유독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출근하자마자 구급차에 몸을 싣고 읍내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질주했다. 굽이굽이 시골길을 돌아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고, 다시 소방서로 돌아오기도 전에 다음 출동 지령이 떨어졌다. 사무실 의자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그는 하루 종일 구급차 안에서, 혹은 병원 응급실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편의점에서 허겁지겁 집어 든 삼각김밥과 바나나우유가 전부였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여유조차 없었다.
연휴, 담양읍 전체가 들뜬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정 소방관에게는 그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일 뿐이었다. 현장에 출동하면서 정 소방관은 신고자와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전화를 했다.
"어머니가 무릎이 영 안 좋으시대요. 평소에도 쑤신다고 하셨는데, 애들이랑 며칠 북적거리니 더 심해지셨나 봐요. 이참에 병원에 한번 모시고 가려고 하는데, 제가 술을 먹어 운전을 할 수 없어요."
"아버지가 혈압약이 딱 떨어졌어요. 연휴라 문 연 약국도 없고, 큰일 났습니다. 혹시 응급실 가면 처방받을 수 있을까요? 급하게 몇 알만이라도…."
"저희 어머니는 평소 다니시던 광주00병원 아니면 안되니 꼭 그쪽으로 가야되요. 번거로우시겠지만, 꼭 그쪽으로 부탁드립니다."
"몇 시쯤 도착 예정이신가요? 어머니는 병원 가실 준비 다 마치셨어요. 천천히 오셔도 괜찮습니다. 도착하실 때는 싸이렌을 꺼주세요. "
정 소방관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요청들을 들으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들은 하나같이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들의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때로는 무심함으로, 때로는 이기심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자녀들... 부모님의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은 효심, 연휴 기간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싶은 조급함.....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명절에 부모님 걱정하는 마음이야 오죽하겠나. 하지만…
정 소방관의 눈은 굳어졌다. 이송해야 할 대상자들은 대부분 멀쩡히 두 발로 걸을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노인은 구급대원의 부축도 마다하고 성큼성큼 걸어 구급차에 올라탔다. 보호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차 키를 들고 구급차 뒤를 따라 병원으로 향했다. 구급차는 그들의 개인 택시처럼 이용되고 있었다.
담양읍에는 119 구급차가 단 한 대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말 위급한 환자가 발생할지 모른다. 심장이 멎거나, 숨을 쉬지 못하거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2시간 가까이 되는 병원 이송과 복귀 시간 동안, 그들에게는 절박한 골든타임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는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응급은, 지금 당장 숨이 넘어갈 듯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 나중에 병원에 가도 되는 일은, 응급이 아니라고. 제발…."
그의 마음은 쉴 새 없이 타올랐다. 단 한 대의 구급차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무게가 정 소방관을 짓눌렀다. 그는 오늘도, 자신의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힘겹게 균형을 잡아야 했다. 연휴의 들뜬 분위기는 그에게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담양읍에 배치된 구급차는 단 한 대뿐이었다.
그 한 대의 구급차가 비응급환자 이송에 매달려 있는 동안, 정말 위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담양은 넓고, 인근 도시까지의 거리는 멀다.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구급차가 도착하기까지 최소 30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심정지 환자의 생존 가능성은 4분 안에 결정된다고 한다. 30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정일권 소방관의 땀방울이 밴 헬멧이 구급차 조수석에 놓여 있었다. 환자를 응급실에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 텅 빈 구급차 안은 유난히 적막했다. 하지만 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환자의 고통스러운 신음, 보호자의 절박한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담양의 푸른 들판은 평화로웠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도로 위, 구급차는 소방서로 향했다. 구급차가 소방서에 도착하려던 찰나,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급차 1호, OO식당 심정지 환자 발생. 즉시 출동 바랍니다!”
정일권 소방관은 망설일 틈도 없이 구급차의 방향을 틀었다. 식당 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현장이 아수라장이었다. 굳은 얼굴의 아내와, 울먹이는 딸이 그를 맞이했다. 환자는 60대 노인이었다.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는 아내의 말에 그는 즉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자동심장충격기(AED)를 연결하고, 가슴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딸은 연신 “아버지!”를 외치며 울부짖었다.
5분, 10분…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노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맥박은 여전히 미약했고, 호흡은 멈춘 듯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아내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그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온 힘을 다해 가슴 압박과 자동심장충격기(AED)를 사용하면서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온 마음을 담아 노인의 가슴을 눌렀다. 그리고 기적처럼, 노인의 입에서 짧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전도 모니터에는 희미하게나마 심박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돌아왔어… 돌아왔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구급차 안, 그는 노인의 손을 잡고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아버님, 괜찮으세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병원이 금방입니다!” 노인은 희미하게 눈을 뜨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 따뜻한 온기에 그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응급실에 도착해 노인을 인계하고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노인의 딸이 다가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번 환자는 불행중 다행으로 구급차가 환자발생장소에 가까이 있어 생명을 살릴수 있었으나 구급차가 비응급환자를 이송하기 위해서 없었다면 생명을 살릴 수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신속한 응급처치와 이송으로 환자는 무사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일권 소방관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는 매 순간 골든타임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만약, 정말 만약에… 지금 이 순간 부모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갑작스러운 사고로, 혹은 지병으로 쓰러지신다면? 그때 119 구급차가 다른 비응급 환자 때문에 출동하지 못한다면…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10년간 수많은 응급 상황을 겪으며 비슷한 상황들을 수도 없이 목격해왔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절규하는 사람들,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더라면 살릴 수 있었다며 땅을 치고 후회하는 유가족들. 그리고 그런 안타까운 상황을 마주하고 죄책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입술을 깨물며 병원 복도를 나서는 동료 구급대원들의 뒷모습. 그는 그들의 깊은 슬픔과 좌절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일권 소방관은 119가 단순한 ‘환자 이송 서비스’가 아니라는 것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119는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희망이자, 가장 빠른 생명줄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응급 환자에게 1분 1초는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감기나 단순한 타박상으로 119를 부르고, 심지어는 택시처럼 이용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들의 안일한 행동이 정말 위급한 누군가의 골든타임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단 1분, 아니 30초라도 더 빠르게 도움을 받을 기회를 박탈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정녕 모르는 걸까?
늦은 저녁, 그는 습관처럼 출동 기록지를 펼쳐 들었다. 오늘 있었던 심근경색 환자 이송 건을 꼼꼼히 기록하며 그는 자신에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나아가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짧은 문장 자신의 업무 노트에 적었다.
“비응급 환자는 조금 늦더라도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응급 환자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
정일권 소방관은 펜을 쥔 채 굳어 있었다. 한 문장을 적었을 뿐인데, 펜 끝에 삶의 무게가 실려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사무실 형광등 아래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는 유난히 길고 무거웠다. 그 그림자 속엔, 오늘 그의 손길로 심장이 다시 뛴 환자의 얼굴, 과거 골든타임을 놓쳐 스러져간 안타까운 기억, 그리고 앞으로 그가 마주해야 할 수많은 위태로운 순간들이 뒤엉켜 아른거렸다.
그는 안다. 119 출동 한 번이 한 사람의 세상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절망 끝에 선 사람에게는 마지막 희망이며, 꺼져가는 생명을 다시 피워 올리는 기적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간절히 바란다.
119를 생명줄로 여기는 간절한 마음들이 모여, 진정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닿을 수 있기를.
119는 택시가 아니다. 아픔을 호소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119는 오직,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이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편의를 위해 던진 돌멩이가 호수에 큰 파문을 일으키듯, 사소한 부주의가 생사의 갈림길에 선 누군가의 기회를 앗아갈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일권 소방관은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어쩌면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수호천사인지도 모른다. 내일도 그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작은 배려와 성숙한 시민 의식이 절실하다.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 작은 양보와 배려가 모여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의 작은 배려가, 누군가의 세상을 다시 밝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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