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미로(Mind Maze)

비번은 없다… 소방관의 하루는 끝나지 않는다(19번째 이야기) 본문

당신은 영웅입니다.

비번은 없다… 소방관의 하루는 끝나지 않는다(19번째 이야기)

마인드헌터(MindHunter) 2025. 4. 7. 09:19
728x90
반응형

 

 

2009년 7월 1일, 무더위가 도시의 숨통까지 죄어오던 한여름.

 

안방순 소방장은 24시간의 전일 근무를 마치고,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끌고 소방서를 나섰다. 발끝에 힘이 풀린 단화는 아스팔트를 쓸며 무겁게 끌려갔고, 방화복 속에서 땀과 연기로 뒤엉킨 살갗은 한 걸음마다 쓸렸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문고리를 잠시 잡은 채 한숨부터 내쉬었다. '오늘은 제발, 오늘만큼은 진짜 좀 쉬자.'

 

집 안은 조용했고, 낡은 선풍기 하나가 무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현관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벗어 던진 옷들을 피해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는 굳어진 어깨를 후려쳤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는 그의 등에선 한동안 물소리만 흘러내렸다.

 

온몸에서 소방서 냄새가 빠져나가자, 비로소 '사람'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전부터 잡힌 약속이 생각났다. 친구들과의 저녁 술자리. 편한 옷 입고,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웃기만 해도 되는 자리. 안방순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셔츠를 꺼내 들었다.

 

그는 모처럼 거울 앞에 서서 셔츠 단추를 채웠다. 평소처럼 경계심 가득한 눈매도, 무겁게 처진 어깨도 오늘만큼은 조금 덜해 보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소방관’이 아니라 ‘안방순’으로 나서려던 찰나.

 

“띠리리리리—”


익숙한 벨소리. 소방서 대표 번호가 선명하게 뜬 휴대폰 액정.

 

그는 한참을 전화기만 바라보았다. 무의식적으로 셔츠 소매를 걷다 멈춘 팔, 굳어가는 얼굴, 다시 짓누르는 현장의 기운.
받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선택’이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의 짧고 굵은 한마디.


“비상입니다. 나주 다시면 냉동창고 대형 화재. 전직원 비상소집.”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직 다 채우지 못한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도 꺼버렸다.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식어갔다.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하다. 비상. 오늘도 못 간다."


잠시 뒤, 답장이 도착했다.


"너랑 술 한잔 하기가 이렇게 어렵냐."
"너 비번 맞냐…?"

 

맞다. 그는 비번이었다.

 

하지만 소방관에게 비번이란 건, ‘잠깐 현장을 떠나 있을 뿐’이라는 뜻일 뿐이다. 출동이 울리면 달려가야 하고, 누군가의 삶이 위험에 처해 있다면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 라는 말은 허락되지 않는다.

 

소방관의 비번은 단지 ‘출동표에 이름이 없을 뿐’이다.

 

사이렌 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붉은 경광등이 어둠을 뚫고 나아갔다. 소방차는 굉음을 내며 나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점점 더 암울하게 변해갔다. 나주의 밤하늘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과 매캐한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화재 현장에 도착한 안방순 소방장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이건… 진짜다.”

 

거대한 냉동창고 전체가 마치 거대한 용광로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는 하늘을 뒤덮었고, 맹렬한 불길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춤을 췄다. 냉동창고 특성상 내부에 보관된 각종 가연성 물질들은 불길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고, 폭발음과 함께 튀어 오르는 불꽃은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냉기가 느껴져야 할 냉동창고 외벽은 펄펄 끓는 쇳물처럼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이미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거대한 불길 앞에선 역부족이었다. 안방순 소방장은 헬멧을 고쳐 쓰고, 방화복을 단단히 여몄다. 마지막으로 공기호흡기의 압력을 확인하고, 그는 망설임 없이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

 

“공기 압 확인 완료. 방수 준비 끝!”

 

냉동창고 내부는 그야말로 지옥의 심장이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문 같았다. 눈앞을 가로막는 짙은 유독 연기, 바닥은 녹아내린 플라스틱과 기름에 절어 한 발을 딛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천장에서는 뜨거운 쇳물 같은 액체가 떨어졌고, 사방에서 균열이 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속이 비명을 지르고, 구조물은 삐걱이며 무너져내리기 직전의 비명을 쏟아냈다.

 

그 안에서 안방순 소방장은 낮고 무거운 숨을 내쉬며, 호스를 움켜쥔 채 무릎을 꿇었다. 단순히 불을 끄는 게 아니었다. 이 안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혹시라도 고립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냉동창고 안쪽 깊숙이 파고들수록 연기는 더 짙었고, 열기는 숨통을 조였다. 방화복 안은 땀으로 푹 젖어 있었지만, 머리 속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그는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공기호흡기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삐— 삐— 삐—

 

공기호흡기의 공기가 떨어졌다는 경고음이다. 

 

그 소리는 익숙했지만, 그날따라 유독 싸늘하게 들렸다. 갑자기 현실이 들이닥쳤다.

그는 너무 깊이 들어와 있었다.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멀리.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자, 되돌아갈 길은 연기에 삼켜진 채 흔적조차 없었다.

 

“젠장…”

 

안방순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 말에 담긴 건 분노도, 두려움도 아닌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었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

 

그는 호스를 꽉 움켜쥐었다.
“이게 내 퇴로다… 이 호스 끝이 밖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출구를 믿고, 발을 떼었다. 한 걸음.
물기와 기름으로 미끄러진 바닥에 무릎이 꿇렸다. 다시 일어섰다.


두 걸음. 어깨 위로 철판이 떨어지며 불꽃이 튀었다.


세 걸음… 네 걸음… 머릿속은 이내 뿌옇게 변했고, 숨은 목 끝까지 차올랐다.

공기통은 마지막 경고음을 내며 그의 폐를 천천히 조여왔다.


의식은 점점 멀어졌고, 세상이 울렁이며 기울었다.

 

그때, 희미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요! 이쪽이에요! 안방순 선배님!”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 마침내, 시원한 공기가 그의 폐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밖으로 빠져나온 그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헬멧을 벗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호흡기를 벗지 못한 채, 한동안 멍하니 밤하늘만 바라봤다. 찢어지고 구멍 난 방화복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그제야 조금씩 느껴졌다.

 

안 소방장은 아무일 없다는 듯이 다시 현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또 다시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도 소방관이기에 내색은 할 수 없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저녁도, 밤도, 새벽도 구분할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교대가 이루어졌지만, 그는 좀처럼 현장을 떠나지 못했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허기가 밀려올 즈음, 장비계 직원이 건네준 빵과 우유를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었지만, 모래를 씹는 듯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22시간…

 

그렇게 길고 끔찍한 화재였다. 나주 냉동창고 화재는 전남 소방 역사에 길이 남을 대형 화재로 기록되었다. 그 처절했던 현장에는 당번도, 비번도 없었다. 모두가 한 몸처럼 움직였고,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켰다.

 

소방은, 누가 근무표에 이름을 올렸는지가 중요한 조직이 아니었다. 불이 나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 나가는 사람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 안방순 소방장은 그날, 자신이 왜 소방관이 되었는지,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다.

 

그는 그날 밤, 진정한 소방관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한 직업이 아닌, 숭고한 희생정신과 뜨거운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헌신 그 자체였다.

 

출처 : 연합뉴스

728x90
반응형